[박상진교수의 나무이야기 . 18] 돌배나무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 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 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 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 (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 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 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옛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 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 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 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 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 아 글자를새기기에 알맞은 것.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 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 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 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 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 었다.

전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 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 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옛부터 토종 배로서 널 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경북대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출처 : 나무이야기18 - 돌배나무
글쓴이 : 금송 윤은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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